앞의 <꿈꾸는 인디언 용사> 이야기는 충북교육의 길잡이 노릇을 해오는 동안 늘 염두에 두어오던 얘기 중 하나다. 나 자신이 ‘꿈꾸는 용사’이고 싶었던 8년을 마감하고 자연인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4년이 다 되어 간다. 스스로 벗을 수 없는 짐을 도민들 덕에 내려놓고 나니 아쉬움과 홀가분함이 교차한다.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중에도 홀가분함이 더 크다. 아무나 겪기 어려운 자리를 경험한 것은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었다.
하지만 과분한 자리는 불편한 가시방석이기도 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 법규나 예산의 한계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적다. 더구나 그중에 ‘하고 싶은 일’과의 교집합을 찾자면 더더욱 협소해진다. 그 자리를 향해 쏟아져 드는 모함과 저격도 끊임이 없다.
그런 가운데, 행복하고 보람되었던 부분도 당연히 적지 않았다. 아이들이 행복한 꿈을 꾸며 설레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행복해 하는 아이들의 성장을 도우며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선생님들을 뒷바라지해 드리려 했던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필자의 재임 기간 내내 ‘자신도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었다.’는 교육 행정 요원들의 실토는 안쓰럽도록 고마운 부분이다. 진보교육의 꿈을 함께 설계하고 도민들의 선택을 같이 받아준 도내 노동 및 시민사회 진영의 따뜻한 응원 또한 두고두고 갚을 빚이다. 그런 분들의 동행과 헌신에 기대어서 충북교육 현장의 긍정 지표들이 활짝 피어날 수 있게 된 일 은, 그 어떤 어려움도 잊을 수 있게 해 준 보람이다.
필자가 임기 내 염두에 두던 화두는 ‘행복교육’이었다. 물론 이 개념이 필자의 전유물은 아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교육들이 행복을 지향한다. 우리 교육기본법도 홍익인간 이념과 함께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목적임을 명시하고 있고, OECD교육 2030 학습나침반도 ‘개인과 사회의 웰빙’을 지향한다. 인류 공영이나 웰빙 모두 행복과 개념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대한민국 역대 정부들, 심지어는 보수 정권들에서도 행복교육을 운위했었다. 단지 그 행복이 ‘미래형’이었을 뿐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는 고진감래형 행복이었다. 힘든 공부의 고통을 잘 이겨야 달콤한 미래를 얻을 수 있다면서, 고난을 이긴 자만이 행복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이러한 관점에는 ‘공부는 본시 어렵고 힘든 것’이라는 학습 관과, ‘행복은 고난을 극복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같은 것’이라는 행복관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러한 학습관과 행복관 모두 사실은 반쪽짜리였다. 공부의 ‘기쁨’과 ‘즐거움’은 접어둔 관점이면서 행복도 승자만의 특권이라는 시각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배움의 현장은 고통의 늪이 되고 행복은 요원한 신기루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행복교육’은 아직도 교육학사전에 오르지 못한 용어다. 그래서 필자 나름으로 개념 규정을 해 보았다. ‘오늘의 배움이 즐거워 내일이 기다려지는 교육’으로. 그래서 취임 즉시, 행복을 미래형이 아닌 ‘당장(Here & Now)’ 맛볼 ‘현재형’으로 소환해 오는 일부터 서둘렀다. 아이들 당장의 삶인 공부부터 무조건 잘하라고 다그치기 전에 좋아지게 만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공부가 즐겁고 재미있어야 학교가 행복한 곳이 된다. 그래야 다음 날의 학교생활도 기다려지고, 그런 날들이 이어져야 미래도 설렐 수 있다. 그래서 취임 초부터 서두른 것이 학생들을 짓누르던 고통지수부터 걷어 내는 일이었다. ‘억지 공부’에 찌들어 가는 아이들의 얼굴을 환하게 만드는 일. 공부를 무조건 잘하라고 몰아쳐 학교를 가기 싫은 곳으로 만드는 상황부터 걷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리고 그 위에 배움을 즐길 ‘신 나는 학교’ 정책들을 채워 나갔다.
덩달아 행복했던 일들
0교시와 일제고사, 고입연합고사, 허울뿐인 자율학습… 들을 폐지하고, ‘행복씨앗학교’, ‘행복교육지구’, 놀이교육, 진로교육, 환경교육… 들을 새롭게 시도해 갔다. 특수교육을 강화하고 유·초·중·고 무상급식과 고교무상교육을 이뤄냈으며, ‘교육공동체헌장’ 제정… 등으로 아이들 의 인권을 보호하고 교육복지를 확대하였다. 교육자치 ‘정책역량 강화’ 에도 힘써 ‘고교교육력 도약’ 비전, 대안교육, ‘아웃도어교육’ 등 미래교 육 청사진을 내놓기도 했다. 그 정책들을 상징하는 슬로건이 “아이들이 웃으면 세상이 행복합니다(제1기)”와 “교육의 힘으로 행복한 세상(제2기)” 이었다. 그런 가운데, 교육감의 역할은 ‘방파제(1기)’와 ‘등대(2기)’역으로 설정했다. 총체적 전략으로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1기)’ 전략과 ‘선 도자(first mover:2기)’ 전략을 내세웠다.
그 결과, 적잖은 영역의 적색 지표들이 하나하나 청색 지표로 바뀌어갔다. 취임 이듬해(2015), 교육부 선정 핵심과제 2개(‘생명존중’부문 및 ‘기초학 력’부문) 전 부문을 석권한 것이 상징적 성과였다. 보수 정권(박근혜 정부) 하에서 핵심과제로 치던, ‘인성과 학력’의 상징 지표인 ‘학생 자살 감소’율 과 ‘기초학력 신장’률의 양대 과제를 가장 뚜렷하게 달성한 교육청으로 뽑힌 것이다. 상패를 전달받으며 교육부총리(황우여)로부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2관왕 교육감”이라는 덕담을 듣기도 했다.
해가 갈수록 학교폭력은 줄어들고 학생‧교사‧학부모들의 학교 만족도는 전국 최상위를 기록해 갔다. 금상첨화로 대학입시 성과도 8개년 간 눈에 띄는 상승세를 보여 갔다. 충북교육계 내 권위주의 풍토가 옅어지면서 민주적 소통도 활성화되어 갔다. 상급 기관의 지시나 지침만 바라 보던 관행들도 모든 단위에서 ‘매뉴얼 플러스+’를 만들어 내면서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8년 동안 재임하면서 미흡하고 아쉬운 면도 없지 않았다. 비정규직 문제 등 교육자치 단위 지방에서 어쩔 수 없는 제도적 한계나 스쿨미투, 특이 민원 대응 등 기대를 채우지 못해 마음 아픈 부분들도 많다. 일선 구 성원들의 자발성을 한껏 피워내 춤추게 하지 못한 아쉬움 역시 적지 않다. 대안교육과 아웃도어 교육, 학부모 성장 지원 등 미래교육 기반을 더 다지지 못한 미진함도 미련처럼 남았다. 그런 소망들이 현장에 충분히 스며들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벅찼던 점도 있었다. 해묵은 관행과 편견의 너울을 걷어내기에 8년은 빠듯하기도 했다.
남은 과제를 찾다가
임기를 마치고 나서 그동안의 일들을 정리하고 평가해 두는 것이 필요치 않느냐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당연히 수긍할 일이다. 운동가가 운동사를 쓰는 격일지언정 참여관찰자로서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하여,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매듭지어야 할 추후 과제로 넘겨둘 생각이다.
하지만 그보다 서둘러야 할 일을 찾게 되었다. 재임 중에 문득문득 느끼면서도 현안들에 매어 엄두를 내지 못했던 작업 ― 교육주체들의 교육관부터 가다듬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사실 우리 국민 모두가 교육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못하는 만큼 각자 나름의 교육관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교육관들이 저마다 다르다.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라 천차만 별, 천양지차다. 그것이 긍정적인 면도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교육 시책의 추진에는 과도한 부담과 에너지 낭비를 부른다. 사안들마다 갈등의 요인이 되고, 때로는 혁신의 발목을 낚아채는 올가미가 된다.
교육관 중에서도 ‘공부의 개념’에 대한 천차만별의 시각들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갈등을 유발한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 공부에 대한 인식을 가다듬는 일부터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일일이 말로 설득하기보다 같이 판단해 볼 자료들을 제시하고 숙의해 볼 것을 제안하는 방법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특히 선거 때마다 첨예해지는 ‘학력관’의 간극이 ‘진정한 공부’의 개념에 대한 혼 란에서 유발되는 것을 직접 겪으면서 절감했다.
‘제대로 된 공부’를 권해야 한다
“공부해서 남 주나?”
학생들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칠 때면 흔히들 버릇처럼 입에 올리던 말 이다. 공부란 본시 그 결과가 자신에게 남는 것이지 남에게 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학습 동기나 의욕을 북돋우자며 그렇게 이기심을 부추겼었다. 공부의 본질보다 이기적 효능을 앞세운 것인데 “닥치고 하라!”던 닦달보다는 그나마 교육적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동기부여로 ‘열공’하게 된 경우일수록, 저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자라기 쉽다. 진리 탐구가 본질인 공부가 승패가 갈리는 경쟁 수단이 되어 버리면 그 결과물로 남을 위하기는 어려워진다.
학업이 일상인 학생들에게 “공부를 왜 하는 거니?” 하고 물으면 금방 대답하는 아이들이 드물다. 필시 무슨 공부에든 매달리고 있을 터인데, 이유도 모르면서 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목적이나 방법을 제대로 알 턱이 없다. 의욕이나 흥미, 효과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다.
겨우 대답하는 아이들도 생각의 깊이는 오십보백보다. 부모님이 시켜서라거나 진학 때문에, 돈 벌려고…와 같이 현실적인 수준들이다. 제 나름 꿈을 가진 경우라도 꿈을 좇아서 공부한다는 정도다. 공부 자체가 좋다거나 하고 싶어서라는 대답은 좀체 만나기 어렵다.
걱정스러운 답변들까지 있다. 남에게 지기 싫어서, 역사가 1등만 기억하니까, 성적순으로 결혼 상대의 얼굴 급이 달라진대서…. 농담조로 하는 말일지라도 그런 수준의 인식이 조금이라도 끼어든다면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학생들의 대답들은 대개 두 부류다. ‘해야 하니까’류와 ‘하고 싶어서’ 류. 대부분은 외재적 동인인 책무감으로 하고, 공부가 좋아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공부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나 이타적·공익적 동기를 찾기는 더 어렵다. “공부해서 남 주나”를 끊임없이 주입받으며 할수록 이타 나 공익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공부라 하여 이타적인 것은 아니다. “오직 너 하나 잘 되길” 바란다는 부모 기대를 업고 우등생도 되고 지도층이 된 이들 가운데도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경우가 어디 한두 명이던가. 심리학 자 김태형의 말을 빌리면 그런 부추김 속에 자란 우등생일수록 ‘가짜 모범생’이다. 일그러진 영웅, 괴물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 경우는 공 직자가 되더라도 공익보다 사익을 우선하는 유형이 되기 쉽다.
그렇다고 아이들만 나무랄 수도 없다. 그 자체가 어른들이 만들어 온 모습이다. 그동안 우리 교육이 온통 겉치레에 매달렸을 뿐, 본질이나 동기 등의 내적 요인들은 외면해 오지 않았던가. 아이들을 문제집에 가두 고 “닥치고 공부!”를 닦달해 온 어른들이 빚어낸 모습들이다. 아이들에 게 공부의 의미와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은 채 책상 앞에 묶어둔 잘못. 아이들의 호기심과 궁금증부터 일구어 주긴커녕 싹부터 잘라버린 채 ‘닥공’을 시킨 결과다. 분별없는 칭찬과 꾸중, 상과 벌, 당근과 채찍 등 외재 적 동기만을 남발하면서, 그것들을 바람직한 교육적 처방이라고 믿었던 눈먼 열정의 소산이기도 하다. 이제 공부의 이유부터 제대로 알려주고 제대로 된 공부를 시켜야 할 때다.
그런 것이 동기가 되어 ‘공부에 대한 공부’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 재임 중 짬짬이 했던 강의 자료들과 독서 노트를 정리해, 어설피 자문자답하던 부분들까지 추려 보았다. 그래서 이 작업이 누군가에게는 공부에 대한 작은 가이드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공부의 5W1H
하여 이 블로그에서는 ‘공부’를 화두로, 육하원칙으로 가닥을 잡으며 차례차례로,
- 공부가 무엇What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 공부의 개념과 원리, 본질과 공부할 거리들을 짚어보고,
- 왜Why 해야 하는지 : 이유와 필요성, 목적을 살핀 후,
- 어떻게How 해야 하는지 : 동서고금의 여러 학습법을 살피고,
- 공부에도 때When가 있는지 : 학습의 적기도 짚어보면서,
- 어디Where서 해야 하는지 : 최적의 공간도 살피는 동시,
- 누가Who 해야 하는지 : 공부와 학습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과제를 안고, 교육 주체들과 탐구 여행을 나서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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