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기존의 자신에게 새로운 지식과 스킬이 더해지는 것이 공부라는 생각부터 버리기로 하자. 공부란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 오히려 생산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공부의 ‘파괴성’을 직시하지 않고 있다.
공부란 곧 자기 파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이런 단정적인 규정과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는 책이 있다. 《공부의 철학》―일본의 젊은 철학자 지바 마사야千葉雅也가 2017년에 출간해 선풍을 일으킨 책이다. 출간과 동시에 일본의 학계와 언론, 출판계로부터 극찬을 받고, 그해 유명대학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으로 꼽힌다. 한국어판도 이듬해 나와, 여러 해가 지난 요즘까지 꾸준히 읽히며 진정한 공부의 본질과 의미를 새기게 하는 책이다.
공부 뒤집어 보기
공부가 ‘자기 파괴’라니 무슨 소릴까. 공부의 ‘파괴성’을 직시해야 한다는 소리는 또 어인 말인가. 해괴한 언술이다. 공부는 자기 성장을 위해 하는 것이니, ‘파괴’가 ‘망가짐’을 말하는 건 아닐 터. 그렇다면, 이어지는 얘기를 들어볼 일이다.
무엇을 위해 자기 파괴로서의 공부라는 무시무시한 행위를 하는가?
바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어떤 자유인가.
바로 지금까지 해온 ‘동조’에서 해방되는 자유다.
그렇다. 공부의 ‘파괴성’이란, 망가뜨림이 아니라 벗어나고 해방되고 자유로워지기 위한 ‘껍질 깨기’다. 무엇으로부터의 벗어남인가? 당연시되는 기존 질서,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 동조로부터의 해방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현실에 적응하고 동조하며 산다. 그러기 위해 공부도 하고, 현실에 유착하는 적응력이 바로 생존력이었다.
하지만 깊이 파고드는 공부라면 우리를 기존의 동조와는 다른 곳으로 이끌 것이다.
그냥 공부가 아니다. 깊이 있는 공부여야 한다. 그것은 이 책에서는 ‘래디컬 러닝Radical Learning’이라고 부르려 한다. 래디컬이란 말은 ‘근본적’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뿌리에 작용하는 공부. 바로 그것을 가능한 한 원리적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공부에 대한 원리적 고찰. 그랬다. 지바 마사야는 21세기 일본 철학을 바꾸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젊은 철학자다. 그는 《공부의 철학》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만의 깊은 공부, 진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도록, 들뢰즈/라캉/비트겐슈타인 등 현대 주요 철학을 바탕 삼아 공부의 원리와 방법을 모색해 제시하고자 한다.
저자는 공부란 지식 쌓기가 아니라 기존의 환경에 동조하며 살아온 사고방식=어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환경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새롭게 변신하며, 자기만의 언어를 갖는 일이다. 이는 곧 깊은 공부, 즐기는 공부로 이어져 내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힘을 갖도록 만든다. 그리고 환경 속에서 평범하게 받아들여지는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는 아이러니적 발상, 하나의 주제에서 폭넓게 가지를 뻗어나가는 유머적 발상을 중심으로 진짜 공부, 깊은 공부를 누구나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면서, 1장 ‘공부와 언어’, 2장 ‘공부와 사고’, 3장 ‘공부와 욕망’, 4장 ‘공부의 기술’ 등―네 가지 화두를 통해 그동안 우리가 간과해 오던 공부의 의미와 방법을 천착해 간다.

머리말에서 그가 말한 것처럼, 현대는 그야말로 ‘공부의 유토피아’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의 바다에 빠져서 살고 있다. 굳이 도서관을 찾지 않아도 책상 위에서 손가락 하나로 온갖 자료들을 다 찾아 쓸 수가 있다. 하지만 정보가 많은 만큼 생각할 여유를 빼앗기고 있다. 인터넷의 ‘정보 자극’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기도 어렵다. 머리를 대신하는 외뇌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두뇌를 쓸 일도 점차 줄어간다. 기본적인 기억조차 기계에 맡기다 보니 ‘디지털 치매’ 얘기조차 나올 정도다. 눈앞에 무더기로 쏟아져 널린 정보들 앞에, 진위 판단조차 내릴 겨를 없이 ‘좋아요’ 여부만 서둘러 응답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공부의 철학》은 이런 정보의 범람과 과잉 상황을 공부의 유토피아로 제대로 활용하면서 깊이 있게 사고하는 공부의 방법을 찾고자 한다.
동조를 끊고 어깃장 놓기
정보의 바다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조류에 허우적대며 ‘동조’하는 삶을 중단하려면, ‘나는 이것을 공부했노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으레 해오던 공부가 아닌 깊은 공부, 삶의 뿌리에 다가가는 근본적 공부인 ‘래디컬 러닝Radical Learning’을 해야 한다. 조류에 흔들리며 떠다니는 동조의 삶에 닻을 내려 중심을 잡기를 바란다면, 공부의 진정한 의미를 분명히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를 주변에 맞추려고만 하고, 동조에 익숙해지려고만 하던 자신을 차라리 ‘동조에 서툰’ 사람으로 전복하기를 원한다면, ‘변신을 위한 공부’에 도전해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공부란 변신이다. 자기 파괴란 바로 변신을 말한다. 기존의 자신은 주어진 환경과 관계 속에서 보수적으로 살아온 존재다. 환경의 당위에 동조해온 존재다. 그런 자신을 전복하고 파괴하려면 다른 사고방식, 다른 화법을 사용하는 환경으로 옮겨가면 된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다른 동조로 이사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언어라는 필터를 매개로 현실과 마주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환경에서는 새로운 언어의 동조에 익숙해지는 것이 과제다. 익숙해지려면 처음에는 낯선 말이 주는 ‘억지로 말하는 느낌’과 ‘부자연스러운 화법’의 불투명성과 만나야 한다. 이것이 도리어 가능성이다. 위화감이 드는 언어를 만나는 것 자체가 언어의 용법과 의미를 뒤흔들어 변경할 가능성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언어를 소통의 도구(도구적 언어)가 아닌, 언어 자체로 대하면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완구적 언어 사용)해 보는 것이 좋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그 일환으로서 ‘동조에 서툰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동조에 서툰 말은 ‘자유로워지기 위한 사고 기술’과 대응한다. 저자는 그것을 위해 ‘말을 가지고 노는’ 완구적 언어의 사용례로 일본식 만담인 만자이漫才 예를 든다. 만자이에는 ‘츳코미’와 ‘보케’라는 콤비가 등장한다. 츳코미는 만담을 진행하고 보케에게 일부러 어깃장을 놓으며 띄워주는 보조 캐릭터다. 보케는 츳코미의 질문이나 요구를 받아 바보스러운 짓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만담의 주역이다. 저자는 츳코미의 언어를 아이러니로, 보케의 언어를 유머로 보고, 이 두 가지가 틀에 박힌 상황을 탈출하기 위한 본질적인 사고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공부를 깊이 하다 보면 ‘딴소리(뚱딴지같은 소리)’를 내고 싶은 때가 많아진다. 저자 말로는 아이러니와 유머가 강해진다. 주어진 환경에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며 ‘깊이 파고드는 사고법’이 아이러니라면, 하나의 주제에서 폭넓게 가지를 뻗어나가며 ‘한눈파는 사고법’이 유머다. 주위의 것들에 의문을 품으며 수직으로 깊어지는 아이러니적 사고(종적 사고)와, 한 가지 주제에 또 다른 주제를 덧대며 수평으로 확장되는 유머적 사고(횡적 사고)를 병행하다 보면, 주어진 담론이나 환경, 관계에서 엇나가는 발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습관화된 자신의 모습을 자기 파괴하면서, 일부러 또 하나의 ‘재수 없는 자신’을 언어적으로 만들어낸다. 그때 비로소 자기 목적적인 공부, 향락적인 공부, 공부를 위한 공부의 발판이 마련되는 셈이다.
공부란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에서 시선을 돌린다면 공부가 불가능하다. 가까운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멀리 규모가 큰 문제로 시야를 넓혀가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생활 속에서 공부의 싹을 키우는 방법을 제안한다. 일상생활의 장면을 떠올려, 그 배경에 있는 환경 코드(당위)를 색출하고, 어떻게 그런 강요를 받게 되었는지, 자신이 그 속에서 어떻게 놀아나고 있는지를 아이러니컬하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것을 추상화하여 키워드를 도출한다. 또, 그 키워드가 어떤 ‘전문분야’에 해당하는지를 생각한다. 공부란 어떤 전문분야의 동조로 이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키워드를 도출하여 들어맞는 분야를 생각해 나가는 방식으로 하다 보면 공부의 범위는 점점 넓어진다. 그래서 ‘응축’이 필요하다. 한도 없고 끝도 없는 공부의 ‘유한화’가 필요하다. 공부는 두 가지 방향으로 한이 없어진다. 하나는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기(아이러니)’이고, 다른 하나는 ‘한눈팔기(유머)’이다. 공부는 아이러니가 기본이므로, 깊이 파고들기를 하다 보면 한눈팔기가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깊이 파고들려는 버릇은 한이 없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주제가 이어져 ‘세상 모든 절대적 근거를 알고 싶어지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러나 세상의 진리가 결국 모습을 드러내는 ‘최후의 공부’란 없다. 절대 최후의 공부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파고들기와 한눈팔기가 반복되는 프로세스를 멈추고 어느 선에서 만족하는 것이 공부의 유한화다.

공부를 유한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단이 필요하다. 결단할 때는 그저 우연한 것, 우연히 만난 것 중에 뭐든 결정해도 좋다. 무언가를 근거 없이 결단하는 것, 역설적으로 그것만이 절대적으로 근거가 부여된 결단이다. 이 결단에 의해 무언가 ‘진리’가 된다. 그러나 ‘결단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 저자가 말하는 결단주의는, 자신의 결단으로 만들어진 진리를 절대화하고, 자신이 진리를 쥐고 있으므로 다른 가능성을 더 이상 보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다. 무언가 그럴듯한(바람직한) 비교를 통해 결론을 내어 적당한 선에서 결단하긴 했지만, 그것을 ‘최선’이나 ‘최종’으로 절대시하면 안 된다.
결단주의에 빠지지 않고 아이러니의 비판성을 살려두려면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복수의 타자가 존재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타자는 타인과 사물,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아이러니컬한 비판은 오히려 어중간한 상태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 그래서 유머적인 유한화로 전환하는 것이다. 유머적 유한화, 이것은 복수의 타자 사이를 여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찰해야 할 대상은 ‘비교를 계속하는 한편 비교를 중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교를 ‘중단’한다고 표현하자. 비교를 계속하면서 임시로 더 나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제대로 된 비교라면 그 결론은 ‘임시고정’이어야 한다. 어떤 결론을 임시 고정해도 비교는 계속되어야 한다. 매일 정보 수집도 계속해야 하고 다른 가능성으로 이어질 정보를 계속 검토 축적해야 한다. 이것이 ‘공부를 계속 하는 일’이다.
비교의 중단은 개개인에게 향락적 집착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향락적 집착은 자신의 흥미와 관심사의 배경을 돌아보고 의미를 다시 파악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은 집착의 첫 단추가 된 우연적이고 무의미한 사건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이것을 위한 자기분석의 방법으로 ‘욕망 연표’ 작성을 해볼 만하다. 자신이 무엇을 욕망해 왔는지 연표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자신에게 어떤 향락적 집착이 있는지 그 성립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이다. 욕망 연표에는 메인 욕망 연표와 서브 욕망 연표가 있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이어주리라고 생각되는 추상적인 키워드를 억지로라도 일부러 떠올린다. 그 키워드는 자신을 움직여 온 커다란 ‘인생 콘셉트’에 해당한다.
환경 앞에서 동조하는 보수적인 ‘바보’의 단계에서, 메타적으로 환경을 파악하고 환경을 겉도는 ‘약아빠진’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단계를 거쳐 메타적인 의식을 지니면서도 향락적 집착에 이끌려 춤과 같은 새로운 행위를 시작하는 ‘다가올 바보’가 된다.
지바 마사야의 《공부의 철학》은 공부에 뜻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다. 독자들을 좀 더 깊은 공부로 초대하려 한다. 그러나 저자는 공부하라고 강요하기 위해 쓰는 것은 아님도 분명히 한다. ‘공부란 무엇인가’를 독자들과 함께 근본적으로 짚어보려는 의도였음이 곳곳에서 보인다.
※ 지바 마사야의 《공부의 철학》은 위와 같은 공부의 원리만을 다루지 않는다. 3부의 일부와 4부는 공부의 기술과 관련한 구체적인 방법론도 다루고 있다. 그 부분은 책을 직접 참고하기 바란다.
'행복한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지식과 지혜, 집단지성의 힘 (0) | 2026.05.01 |
|---|---|
| 럼스펠드의 4가지 앎의 영역 (0) | 2026.05.01 |
| 삶의 도구, 공부 (0) | 2026.04.30 |
| 사전에 나오는 공부의 정의 (0) | 2026.04.30 |
| 공부, ’마법의 돌’을 줍는 일 (0) | 2026.04.30 |